RELIEF · 진료 철학

검사 결과는 정상인데
증상이 계속되는 이유는?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로 이해하는 검사 수치, 통증점수와 실제 몸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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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한의원 사슴 로고가 음각된 황동 클립과 명함, The map is not the territory.가 적힌 노트가 놓인 책상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지도, 그리고 지도 밖의 세계

검사 결과는 정상인데 몸은 계속 불편할 수 있을까요? 통증 점수가 그대로라면 치료에도 변화가 없는 걸까요?

진료실에서는 종종 검사 결과나 숫자만으로는 환자가 경험하는 증상의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을 만납니다.

처음 가는 도시에서는 지도를 봅니다. 지도에는 도로와 건물, 지하철역과 강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화면 하나만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지도에는 그곳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가 없습니다. 그 길의 경사가 얼마나 가파른지, 어느 골목에 오후의 햇빛이 오래 머무는지, 비 오는 날 어디에 물이 고이는지,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는 표시되지 않습니다.

지도는 현실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정보를 덜어내고 필요한 것만 남겼기 때문에 유용합니다.

코르지브스키가 지도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올바른 지도는 실제 영토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유용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핵심은 표상이 무엇을 보여주는지와 무엇을 생략하는지를 함께 아는 것입니다.

좋은 지도는 현실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문제는 지도가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할 때 생깁니다.

MRI, 혈액검사, 통증점수: 몸을 이해하기 위한 지도

의학 역시 사람의 몸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정교한 지도를 만들어왔습니다.

MRI와 X-ray 같은 영상검사는 몸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혈액검사는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몸의 상태를 수치로 표현합니다. 진단명은 여러 증상과 검사 결과를 하나의 이름 아래 정리해 같은 질환을 연구하고 치료할 수 있도록 합니다.

통증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숫자척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통증을 0에서 10까지 표현한다면 어느 정도인가요?” ‘아프다’라는 개인적인 경험을 숫자로 표현하면 이전과 현재를 비교하고 치료 경과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검사는 중요합니다. 현대의학의 발전은 보이지 않던 몸을 더 잘 보고, 측정하고, 구분할 수 있게 된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료를 하다 보면 검사 결과나 통증점수가 그대로인데도 환자의 실제 생활은 분명 달라져 있는 경우를 만납니다.

CASE
통증은 여전히 5였지만, 불편함이 시작되는 시간은 늦어졌습니다.

장시간 수험 생활 · 만성 목·어깨 통증 · 피로와 무기력

FIRST VISIT

첫 내원

하루 8시간 이상 공부하며 오전부터 목·어깨가 뻐근했습니다. 몸이 무겁고 쉽게 지쳐 책상에 앉는 일부터 힘들었습니다.

FOLLOW-UP

경과 확인

가장 심할 때의 통증은 여전히 5였습니다. 하지만 한두 시간 만에 시작되던 불편함이 오후 서너 시로 늦어졌습니다.

DAILY CHANGE

달라진 일상

저녁에 지쳐 누워 있는 시간이 줄었습니다. 통증 강도는 같아도 편안하게 공부하는 시간과 할 수 있는 일이 늘었습니다.

※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는 제외했습니다. 이 사례는 한 환자의 경과를 설명한 것으로, 진료 결과는 개인의 상태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검사 결과와 증상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체중은 지난주와 같은데 아침의 붓기가 줄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잠든 시간은 비슷하지만 새벽에 깨는 횟수가 줄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검사에서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두근거림이나 어지럼, 소화불량, 피로와 같은 불편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숫자나 검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체중계는 체중을 측정하고, 혈액검사는 혈액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보여주며, MRI는 특정 부위의 구조적 상태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검사가 무엇을 보여주는 검사인지, 그리고 무엇까지는 보여주지 못하는지를 함께 이해하는 것입니다.

MRI는 목의 구조를 보여줄 수 있지만 그 통증 때문에 어젯밤 몇 번 잠에서 깼는지까지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체중계는 오늘 아침의 체중을 알려주지만 오후의 허기나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정도까지 측정하지는 않습니다.

검사는 몸에 대해 말하고,
사람은 자신의 몸에서 살아본 경험을 말합니다.

진단명이 같아도 증상은 왜 다를까요?

진단명 역시 하나의 지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불면’이라고 해도 실제 모습은 다릅니다.

잠들기까지 두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 있고, 잠은 쉽게 들지만 매일 새벽에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잤는데도 아침이면 지쳐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소에는 잘 자다가 중요한 일을 앞두었을 때만 잠들기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진단명은 중요합니다. 이름이 있기 때문에 질환을 연구하고, 치료 방법을 공유하고, 같은 문제에 대해 의료진 사이에서 소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단명은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지, 그 사람에 대한 설명의 끝은 아닙니다. 같은 진단명 안에서도 증상이 나타나는 시간과 양상, 악화 요인, 수면과 식사, 활동량, 그리고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를 들고, 실제 영토를 걷는 일

디어한의원 진료실에서는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진단명을 살펴보고, 통증의 정도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조금 다른 질문들을 덧붙입니다.

언제 가장 불편했는지, 지난번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괜찮은 시간은 얼마나 길어졌는지, 잠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식사는 어떤지, 그리고 그 증상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 중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인지 묻습니다.

검사 결과를 봅니다.
그러나 검사 결과만 보지는 않습니다.

좋은 진료를 위해서는 좋은 지도가 필요합니다. 필요한 검사를 하고, 객관적인 지표를 확인하고, 변화가 있다면 기록해야 합니다. 다만 그 지도를 펼친 뒤에는 고개를 들어 실제로 그곳을 걷고 있는 사람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도를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능한 한 정확한 지도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도 위의 한 점만으로 한 사람의 상태를 모두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진료란 어쩌면, 좋은 지도를 손에 들고 한 사람의 영토를 함께 걸어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의 핵심

검사 결과가 정상이라면 증상도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검사는 특정한 항목과 범위를 평가하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환자가 경험하는 모든 증상과 기능적 불편을 하나의 검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통증점수가 그대로라면 치료 경과에도 변화가 없는 것인가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통증의 최대 강도뿐 아니라 발생 빈도, 지속시간, 증상이 시작되는 시점, 수면과 활동에 미치는 영향, 일상 기능의 변화 등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객관적인 검사보다 환자의 느낌이 더 중요한가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객관적인 검사와 환자가 경험하는 증상은 서로 다른 정보를 제공하며, 필요한 경우 두 정보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고자료

  1. Korzybski A. A Non-Aristotelian System and Its Necessity for Rigour in Mathematics and Physics. Presented at the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1931.
  2. Korzybski A. Science and Sanity: An Introduction to Non-Aristotelian Systems and General Semantics. International Non-Aristotelian Library Publishing Company;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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